서주(西周)왕조 말기, 노예를 부리는 귀족들이 점점 문란해지면서 지속적으로 재물을 빼앗고 전쟁을 일으키며 백성과 노비를 억압했다. 주려(周厲)왕 직위 후 백성과 노비에 대한 착취와 억압은 더욱 심해졌다. 그는 탐심이 많아 산, 들, 천에 이르는 모든 티끌까지도 독식하려 했고 백성이 사냥을 하거나, 땔감을 줍거나, 물고기를 잡는 것 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게다가 사람들을 보내 백성들의 언행 까지도 감시하도록 하여 누가 왕에 대해 나쁜 말을 하면 즉시 목을 베어버리도록 했다. 백성들은 참고 또 참다 결국 여기저기에서 반란이 일기 시작했다. 주(周)왕조의 통치는 점점 불안정해졌다. 주(周)왕조의 정권이 흔들리자 나라를 사랑하는 대신들은 마음이 아팠다. 이 때 충직한 대신 범백(凡伯)이 주(周)왕에게 학대와 폭력의 정치를 거두고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구제하라고 간언했다. 그러나 주(周)왕은 듣지 않았고 일부 신하들도 범백(凡伯)을 비웃었다. 범백(凡伯)은 화가나 그 길로 한 편의 긴 시를 써내려 갔다. 그 중 한 구절에 이런 내용이 있다.
“하늘의 박해가 기승을 부리니 즐거워 만은 마시오 늙은이가 마음을 다하여도 젊은이들은 스스로를 자랑으로만 여길 뿐이라 내 외람되이 진언하는 것은 늙은이의 혼미한 잔소리가 아닐진대 오히려 비웃음으로 대답을 하는구려 당신들의 위세가 매우 강렬하니 그야말로 중병이요 고칠 약도 없구나”
이 시의 내용은 범백(凡伯)의 간언을 사사로이 여기지 말하는 뜻을 왕과 그 대신들에게 전하고 있다. 이러한 원흉들이 계속되면 종국에는 위기를 막으려 해도 막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범백(凡伯)의 예상대로 공원전 842년 폭동이 일어났고 백성과 노비들은 손에 무기를 들고 군왕을 쫓았다. 결국 주(周)왕은 이곳 저곳으로 도피를 다니는 처지가 되었고 서주(西周)는 막을 내리게 된다.